내 인생의 회심-유용국 목사 [국민일보 2012년 7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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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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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회심-유용국 목사] 고1때 부흥회서 강력한 성령체험 1·1·1 실천
나는 1961년 2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6형제, 어머니는 4형제였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무교 집안이었다.
내가 태어난 지 100일 정도가 지났을 때 30대 초반의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직업보도학교(직업훈련학교)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던 어머니는 가족의 형편을 딱하게 여기신 여주중앙감리교회 목사님의 주선으로 교회 부속 주택에 들어가게 됐다.
어렸을 적 기억은 예배와 부흥회 기억밖에 없다. 교회는 놀이터였고 삶의 공간이었다. 매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부흥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성령체험을 하게 된 것은 여흥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그때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성령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강력한 성령의 임재 속에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게 됐다.
성령체험의 감동이 워낙 컸기에 그때부터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결심한 게 세 가지인데 ‘매일 교회에서 1시간씩 기도하고 1시간씩 교회청소를 하며, 1시간씩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1년 넘게 그 원칙을 지켰던 것 같다. 중·고등부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사역자의 소명을 받았다. 주께서 부르시면 어디든 가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많은 분들이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다고 격려해 주셨다.
81년 드디어 서울신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신학교 시절이 생각만큼 은혜롭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의 성령체험은 온데간데없고 점점 하나님이 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방언이나 성령체험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어찌된 일인지 대학교 3학년 말에 피가 섞인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병원 갈 돈도 없었다. 점점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신학교도 휴학을 했다. 맡고 있던 사역도 모두 내려놨다. ‘아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말 저에게 이렇게 하셔도 되는 겁니까.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제가 이래봬도 신학생 아닙니까.’
기침은 끊이지 않았다. 하나님을 떠났으니 기쁨도 없었다. 정말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아프니 밖에 나가기도 싫었다. 어렸을 때는 신앙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반항심에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며 예배 때 맨 끝자리에 앉았다.
어머니조차 나의 이런 사정을 도울 수 없었다. 평생 교회에서 성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서운했다. 아프고 나니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게 됐다. 하나님을 부정하니 머릿속에 혼란이 다가왔다. ‘좋습니다.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내고 보니 궁지에 몰린 쥐처럼 초라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민과 번민 끝에 결국 나는 하나님께 백기투항을 하고 말았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저를 고쳐주십시오. 제발 좀 고쳐주세요. 살려주시면 정말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점점 기침이 줄어드는 게 아닌가.
병이 낫는 데는 꼬박 1년이 걸렸다. 이 처절한 기간 동안 내 자신이 철저히 죄인이며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게 됐다. 이때 나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를 배웠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중 88년 의정부에 있는 외국인 크리스천 학교 교목으로 들어가게 됐다. 돈 한 푼 없었기에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거기서 3년간 사역을 했다. 하루는 학교 이사장이신 헤일 목사님께서 부르셨다. “유용국 목사님, 미국 유학을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물론 나의 대답은 결정돼 있었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예, 꼭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재정 문제가 있어서요.” “걱정 마세요. 장학금을 받도록 해 드릴게요.”
그렇게 90년 미국 리버티대에 진학하게 됐다. 4년간 신학과 교육학을 배웠다. 그리고 94년부터 6년간 미국 크리스천 초·중·고등학교 기획실장 역할을 맡으며 학교 운영방법을 체험했다. 특히 크리스천 학교와 교회가 같이 운영될 때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직접 봤다. 교회 혼자만 서 있으면 신앙전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공동체가 무너지는 현상을 여러 번 봤다.
2001년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왔을 때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무너진 교육의 현장이었다. 주일학교의 교회교육이 무참히 무너져 있었다. 우리 교단만 하더라도 전국의 교회 중 50%는 주일학교가 없었다. 애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5년 학생 7명을 데리고 20평 지하 사무실에서 한국국제크리스천학교를 시작했다. 2006년 부천시 송내동으로 학교를 이전했고 2007년엔 충북 괴산의 한 분교를 매입했다. 2010년엔 미국 크리스천학교연합(AACS·American Association of Christian Schools)의 한국 대표기관으로 선정됐다. 현재 학교엔 55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인천 수정교회, 양산 온누리교회 등 22개 교회가 기독교 대안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컨설팅을 해 주었다.
교육사역은 정말 이 민족을 구원할 ‘방주사역’ ‘출애굽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정, 교회, 학교, 국가’ 이 네 가지 중 하나만 무너져도 다른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교육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 교육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을 방주 안으로 모으는 방주사역이다. 또 이 민족을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하는 구속사적 출애굽 사역이다. 분명 한국교회 제2, 제3의 부흥은 크리스천 학교와 함께 올 것이다.
이렇게 학교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시절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 권위에 순종했다. 모든 학업과 생활표준을 여기에 뒀다. 예배기도 말씀에 집중하니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됐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면 기적은 반드시 일어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유용국 목사
서울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리버티대에서 교육학과 신학 석사를 취득했다. 미국 리버티 크리스천스쿨, 페어펙스 크리스천 스쿨 등에서 교목을 역임했다. 2004년부터 서울신대에서 강의했으며, 2005년 한국국제크리스천학교를 설립했다. 한국국제크리스천학교 교육재단 이사장과 서울신대 이사를 맡고 있다.
관련 글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213932&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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